역사학자 하영휘(57) 가회고문서연구소장은 `고문서(古文書) 달인`이다.
온종일 연구실에 앉아 수백 년 전 사람들이 쓴 편지와 일기 등 고문서를 들여다보는 것이 그의 일이다. 특히 옛편지 연구에 15년에 가까운 세월을 바쳤다.
보통 사람이면 며칠도 못 버틸 일을 그는 "재밌다"고 했다.
그런 그가 최근 `큰일`을 냈다.
동료 학자 6명과 함께 선인들의 옛편지 간찰(簡札) 용어 사전인 `옛편지 낱말사전`(돌베개)을 펴낸 것.
이 책은 하 소장과 동료 학자들이 7년의 연구와 집필로 완성한 국내 최초의 간찰 용어 사전이다. 조선 시대 간찰은 대부분 초서로 쓰여 있고 간찰에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어휘들이 많아 전문 연구자들도 해독하기 어려운 자료다.
하 소장과 동료 학자들은 고려말 정몽주의 편지부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서한까지 옛편지를 샅샅이 뒤져 사전을 펴냈다.
13일 기자와 만난 하 소장은 "처음 시작할 땐 2-3년 정도면 사전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겁 없이 덤벼들었다가 발목이 잡혔다"면서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7년부터 14년째 사단법인 `우리문화사랑`에서 강의를 해온 하 소장은 강의를 통해 인연을 맺은 동료 학자들과 의기투합해 사전을 만들게 됐다.
하 소장과 동료 학자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고, 각자 찾아낸 용어를 사이트에 올리는 방식으로 공동 작업을 했다. 또 격주 아니면 매주 모여 사전에 올릴 용어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아무런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사전을 만든 것은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사전 편찬 작업은 알아주는 사람도 없어요. 누가 강제로 시켰으면 못했을 거에요. 그저 재밌어서 한 일입니다."
서강대에서 조선 후기사를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은 하 소장은 1989년부터 2006년까지 17년간 재단법인 `아단문고`에서 고서와 고문서를 정리했다. 옛편지의 매력에 빠진 것도 그 시절이었다.
그에게 옛편지는 `보물창고`였다.
"편지에는 조선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아주 소소한 사생활부터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하층민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인 모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유학자 조병덕은 아들에게 1천700여 통이나 되는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중에는 첩과 놀아난 노비를 몽둥이로 때려죽인 아들을 야단치고 걱정하는 내용의 편지도 있습니다. 퇴계 이황은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는데 나이가 한참 어린 기대승에게 언제나 예의 바르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요즘 사람들도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그는 옛편지를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다"고 했다.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편지를 써서 윗사람에게 아부하기도 하고, 지연, 혈연, 학연, 정치적 당색에 의해 서로 관계를 맺는 모습도 똑같아요. 그런 관계들이 촘촘하게 짜여서 사회와 국가를 형성합니다."
2008년 조병덕이 쓴 1천700여 통의 편지를 분석해 `양반의 사생활`을 펴낸 데 이어 2009년 오세창 선생이 역대 명사들의 글씨를 모아 엮은 글씨첩 `근묵(槿墨)`을 번역 출간한 하 소장은 이번에는 조선 시대 일기를 번역해 소개할 계획이다.
"조선 시대 일기가 많이 사장돼 있는데 번역해 소개할 생각입니다. 일기도 편지처럼 그 당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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