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대는 결성 이후 바로 독도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직을 발기한 다음 달인 5월 20일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다. 여기에 고 홍순칠 대장이 출마해 자연스럽게 독도 주둔이 연기됐다. 당시는 울릉도에서도 국회의원을 1명 선출하던 시기였다.독도방위대가 선거 이후에 독도에 들어가게 됐다는 사실은 독도에 들어갔던 수비대원 다수의 증언기록 등이 확보돼 있다.또한 1954년 7월 23일 한국 정부는 일본 참의원들의 독도 시찰 보도를 접하고 이에 대비하는 3부관계자합동연석회의(법무, 외무, 내무)를 열어 대책을 마련했다. 회의 결과에 따라 경찰은 독도경비 강화를 결정했다. 이 회의는 조선일보가 이틀뒤인 7월25일 `독도방위에 만전, 각 부처 관계관 긴급대책을 수립`이라는 내용으로 기사화했다.뒤 이어 8월 11일 경상북도 경찰국은 울릉군과 울릉경찰서에 독도에 경비초사 건립을 지시했다.공사 책임자는 울릉경찰서 박춘환 경사였고 목재는 현재 울릉읍 도동리 행남마을 야산에서 벌목했다. 이 증언은 당시 공사책임자였던 울릉경찰서 박춘환 경사가 지난 2007년 5월6일 포항에서 A씨에게 증언했다.경비초사 건립사업은 그 해 8월 28일 독도에서 울릉경찰서장, 교육감 등 기관장이 참석한 가운데 영토 표석과 경비초사 건립 기념식이 열렸다.
또 8월 1일 울릉도-독도 간 무선설비가 완성됐다.(조선일보 1954년 8월 30일 자, `독도와 울릉도간 무선시설을 완비`)이에 울릉경찰서는 통신사 순경 허학도를 독도에 파견했다.
기자가 지금까지의 정황이나 기록등을 파악한 바 독도의용수비대의 독도근무는 1953년 4월 20일이 아니라 최소한 1954년 5월 20일 이후가 정확하다. 특히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주둔한지 2~3개월 후인 통신시설 설치가 완비된 54년 8월부터는 수비대원들과 경찰이 함께 독도 동도 막사에서 지낸 것이다.
통신사인 허학도 순경의 독도근무는 고 홍순칠 대장도 언론이나 자서전에서 여러차례 밝힌 바 있어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1954년 8월 독도 경비초사가 건립되었으나 울릉경찰서에서는 독도에 상주할 경찰병력이 부족했고, 이에 부득불 독도의용수비대원과 경찰이 섞여서 근무하게 됐다. 이 같이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은 故 홍대장도 자서전을 통해 정확히 밝히고 있다. 이 해 12월 31일 경상북도 경찰국은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독도의용수비대원 가운데 서기종, 김영복, 이규현, 황영문, 양봉준, 정원도, 김영호, 하자진, 이상국 9명을 경찰관으로 특채했다.
즉 우리 경찰이 독도경비를 본격 전담하면서 독도의용수비대는 54년 12월 해산된 것으로 봐야 한다. 울릉경찰서는 1955년부터는 특채된 경찰관을 중심으로 독도경비대를 구성해 독도 상주 경비를 시작했고, 2교대 근무가 시작됐다. 홍순칠 대장은 이때 경찰관 특채 제안을 거부하고 상이군인회 회장으로서 3년 동안 울릉도 상인군인에게 주어진 `독도 미역채취권`을 행사했다. 홍 대장은 수비대가 해산된 이후 1955년부터 56년까지 미역 채취시기가 되면 서도 물골에 숙소를 마련하고 제주도 해녀를 고용해 작업했다. 이 모든 사실들은 기록들이 발견돼 A씨가 소장하고 있다.
이제 총체적으로 정리해보자. 1953년 4월 이후 일본은 최소한 6회 이상 독도에 불법 상륙해 우리 어민을 상대로 협박하고 일본 영토라는 표식을 세우고 돌아갔다. 1차 침범이 있었던 5월 28일부터 10월 23일 불법침범까지 지금까지 알려진것과는 달리 독도에 독도의용수비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독도침탈이 잦아지자 울릉군민들은 1954년 4월에서야 독도방위대를 결성했고, 울릉군과 경찰서의 식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독도경비를 시작했다. 1954년 12월 31일 대원 9명이 경찰로 특채되며 독도의용수비대는 해산됐다. 1955년부터 울릉경찰서는 순수 경찰관만을 상주시켜 독도경비를 전담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공식 사용되고 있는 독도의용수비대의 `53년 4월~56년 12월까지 3년 8개월 독도 주둔`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며 수비대의 활동 기간은 최대한 1954년 4월~1954년 12월(8개월)로 반드시 정정돼야 한다고 본다.
1950년대 독도경비사는 독도의용수비대가 아닌 국가 기능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라도 재정립돼야 한다. 울릉도 주민의 영토 수호의지로 결성된 독도의용수비대는 6․25전쟁 중이 아니라 전쟁 후로 정정돼야 한다. 이들은 전쟁 후 혼란한 정국에서 몇달은 독자적으로 독도를 지켰고 이후 부족한 경찰병력을 보완하며 일본의 독도 침략을 저지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은 8개월 또는 3년 8개월이라는 기간의 길고 짧음으로 평가할 수 없다. 단 하루를 독도에 주둔했다하더라도 그들의 애국혼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하지만 이들의 공적을 왜곡하거나 날조해서는 안된다. 일본이 항상 지켜 보고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된다. 거짓 역사주장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줄 뿐 아니라 역풍을 맞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우리를 믿지 않게 될 것이다. 반드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해야 된다.
현재 울릉도 북면 석포마을에는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건립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곳에는 수비대들의 모든 자료가 들어가 일반에게 공개된다. 학생들의 발길도 이어질 것이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보여 줄 것인지 왜곡된 역사를 공개할 것인지는 특히 정부의 판단과 결정이 중요하다. 언론과 학계의 진실규명 노력도 필요할 뿐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명백한 기록은 애국혼에 목숨까지 바치고자 했던 수비대원들의 숭고한 명예와 자긍심을 높이 받드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고인이 되신 수비대원들의 명복과 생존 대원들의 건강을 기원드린다. [경상매일신문=조영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