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은 지난 3일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뜻을 기리고, 한ㆍ일 문화 교류의 장이 될 ‘달성 한일우호관 개관식’을 개최했다. 이날 개관식에는 김문오 군수, 배사돌 군의회 의장 및 의원, 일본 와카야마시 오하시 겡이치 시장을 비롯한 지자체 공무원 및 주요인사, 기관단체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달성 한일 우호관은 2009년부터 3년간 총 사업비 50여억 원으로 가창면 우록리 녹동서원 옆 4,198㎡의 부지에 지상 2층 규모로 건립, 1층에는 홍보 영상관, 전통 예절실, 교류 역사 체험관이 있고, 2층에는 기획 전시실과 야외 전통놀이 체험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 내부 1층은 3D 입체영상으로 그려지는 김충선 장군의 발자취와 통신사 행렬모형 등으로 만들어진 한일 교류 역사 체험관, 장군의 밀랍 인형 및 평화메시지 청취 등으로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고, 2층 기획 전시실에는 일본에서 기증하거나 임대한 각종 유물도 관람할 수 있다.
▲녹동서원 김충선 장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때 김충선(사야가)은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왔으나,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해 수백 명의 왜병을 이끌고 귀순했다.
김충선(사야가)은 자신의 철포부대 5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귀화해 그는 조선의 장수로 울산, 경주, 영천 등지를 돌며 공을 세우고, 곽재우를 돕는 등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조선군에 전수했다.
이후 사야가가 왜군에게 함락됐던 18개의 성을 되찾아오자 도원수 권율은 왕에게 이를 포상할 것을 간청, 마침내 그는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의 관직을 부여받고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왜란이 끝나자 그는 자청하여 북방을 어지럽히는 여진족을 소탕하고자 10년 여간 여진족을 토벌, 공을 세우고 그 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괄의 부장 서야지를 목을 베는 등 162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광주 쌍령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대승, 무훈을 떨쳤다.
전란이 가라앉자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고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의 가풍을 지키다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임금이 성(姓)을 내렸다는 뜻의 ‘사성’(賜姓)을 본관 김해 앞에 붙여 사성 김해 김 씨로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友鹿)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전국에 17대까지 대략 2,000세대, 7,000여 명의 후손이 있다.
14세손 김재석(67)씨는 “조선 문물을 흠모해 귀화한 할아버지는 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라는 칭호를 받으셨다”며 “조선에는 대충신이나, 일본에게는 천하의 반역자일거라”고 말했다.
서원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렸고, 뒤편에는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서 있으며, 뜰에는 모하공김공 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가 영산홍, 수국, 모란, 향나무, 무궁화 사이에 서 있다.
1915년 모하당 문집이 재간되자 일본학자들은 “이와 같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는 사실을 믿는 이가 있는 것은 유감의 극”이라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됐다.
또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이런 분위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일본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동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1992년 임진왜란 및 김충선공 귀화 400주년 기념제가 녹동서원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천하의 매국노’가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활, 일본 NHK방송은 ‘출병에 대의 없다-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다큐멘타리를 내보냈다.
김충선은 임종을 앞두고 후손들에게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는 가훈을 남겼다.
이방인으로 타국에 뿌리 내리려면 절대로 드러내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김충선의 일본 가문인 사야가 가문은 일본에서 사라졌다. 역적의 가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만 않았을 터. 김충선은 바람 부는 날이면 고향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우록동 소재의 이 서원은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도유생이 상소하여 정조 18년(1794)년에 건립한 것이다.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85년에 재건되었으며 1971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현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경내에는 정면 5간, 측면 1간, 팔작지붕의 강당과 정면 3간, 측면 1간, 맞배지붕의 녹동사와 정면 3간, 측면 1간의 향양문이 있다.
노후에는 가훈과 향약을 지어 자손을 훈도하고 좋은 마을 만들기에 전념하였다.
김문오 군수는 “매년 1만여 명 이상의 일본인 관광객들이 녹동서원을 찾아 장군의 뜻을 기렸는데, 이번 달성 한일 우호관 개관으로 더 많이 다녀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달성 한일 우호관이 한국과 일본의 문화관광 교류의 장으로써 양국간 우호를 다지는 매개체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달성군은 이번 개관식에 30명의 방문단을 인솔한 와카야마시 오하시 겡이치 시장에게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삶과 걸어온 길을 되새겨 볼 수 있는 달성 한일 우호관에 많은 일본인이 찾아 줄 것을 홍보했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