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 친박(친박근혜)계가 본격적인 해체 수순을 밟을 것으로 전망되면서 친박이라는 정치 세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친박은 `친박근혜`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 노선을 따르는 한나라당 내 의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박 전 대표가 지난 2004년 탄핵 후폭풍 당시 당 대표로 전면에 나서면서 친박이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박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라는 게 중론이다.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이명박ㆍ박근혜 후보가 사실상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상황에서, 친박은 당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친이(친이명박)계와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결국 이명박 후보가 승리했고 이후 친박은 2004년 `주류`이던 상황과는 정반대로 철저한 `비주류`로 전락했다. 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 대선 승리 이후인 2008년 18대 총선 공천이다. 친이계가 주도한 공천에서 친박 좌장이던 김무성 의원을 포함해 친박 주요 의원들이 대거 탈락했다. `친박 학살공천`이란 말이 나왔다. 박 전 대표는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면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낙천한 친박 인사들은 이후 무소속이나 `친박연대` 소속으로 출마, 다수가 당선된 뒤 이후 대부분이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박 전 대표를 비롯한 친박은 이후 `비주류`로 철저히 낮은 자세를 취했다. 박 전 대표도 이 기간을 "살아남기도 버거운 시간이었다"고 회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09년 말부터 계속된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원안을 주장해 온 박 전 대표와 친박계는 수정안을 주장한 친이계 주류와 정치적 생명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다. 원안을 지켜내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인한 박 전 대표는 이후 이 대통령과 `8ㆍ21` 회동을 통해 외견상이나마 협력 관계를 복원했고, 이후부터 당내 친이계 의원들과도 교류를 넓히며 정치적 존재감을 넓혀나갔다. 친박이 비주류에서 `주류`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이었다. 당시 친박계는 당내 쇄신파와 손을 잡고 열세가 예상되던 황우여 의원을 원내수장으로 `옹립`했다. 이 같은 상황변화 때문에 당내에서는 `주이야박`(낮에는 친이ㆍ밤에는 친박)이라는 우스갯소리도 흘러나왔다. 주류로서의 친박의 힘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은 지난 7ㆍ4 전당대회에서 홍준표 대표와 유승민 최고위원 체제를 이끌어낸 것이다. 당시 친박계는 친이계 견제ㆍ박근혜 체제 구축이라는 차원에서 홍 대표와 유 최고위원에 몰표를 던져 여당 지도부의 1,2위를 `아군`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친박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당 쇄신안 논란 과정에서 `홍준표 체제`에 힘을 실어주지 않아 홍준표 체제의 붕괴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박근혜 비대위` 출범에 즈음해 친박 내에서는 계파 해체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박 전 대표가 비대위원장으로 당을 운영해 나가는데, 친박이라는 계파가 존재하면 정치적 부담이 되는 만큼 스스로 장애물을 걷어주자는 것이다. 대표적 친박계 모임인 `여의포럼`이 내주 해체하는 것은 상징적 조치다. 박 전 대표의 측근 그룹도 `박근혜 비대위`가 공식 출범하면 공식적으로 `친박해체 선언`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친박이라는 정치세력은 등장한 지 약 7년 만에 정치사에서 조금씩 존재감을 지워갈 것으로 보인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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