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칼럼(청송 노래산 성지조성을 기대하며) 청송(靑松)은 성지(聖地)다. 그것도 7명의 복자를 탄생시킨... 청송군 안덕면에 위치한 노래산(老萊山) 교우촌 복원과 성지조성 사업이 조속히 추진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길 바란다.성지(聖地)라고 함은 순교자들의 묘소나 출생지 또는 과거의 교우촌을 일컫는 말로 청송 노래산(743m) 교우촌은 많은 교우들이 살다간 흔적마저 사라져 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이곳 노래산 성지조성의 필요성을 굳이 설명하자면 1815년(순종 15년) 을해년에 일어난 을해박해 사건은 경상좌도에 종교탄압이 가장 큰 사건으로 그 진원지가 바로 노래산 교우촌이기 때문이다.당시 노래산 교우촌에는 고성운(高聖云), 고성대(高聖大), 최봉한(崔奉漢) 등 35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고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끌려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14명은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됐다.이때 청송군 진보 머루산에서도 김시우(金時佑) 등 30여명이 체포돼 안동진영에서 22명이 배교하고 나머지 13명은 역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는 등 모두 71명이 체포돼 33명이 대구감영에 갇히게 됐다.이렇게 갇히게 된 천주교 신자 중 26명은 옥사를 당하고 이듬해인 1816년 12월 16일 7명의 신자들은 사형을 당하게 된다.지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과 시복미사에서 노래산 교우촌 신자 중 7명이 복자반열에 올랐고 이는 한 교우촌에서 이처럼 많은 복자가 탄생한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복자반열에 한 두 사람이 오른 다른 곳의 순교자와 교우촌은 벌써 성지기념사업이 이뤄졌지만 청송 노래산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복자들이 살다간 흔적마저 사라지고 있어 성지조성은 더더욱 시급한 실정이다.이곳 노래산은 산의 형세가 네 신선이 걸어가는 발모양 같이 생겨 늙은 보래(神仙)들이 오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반도의 동해안 쪽으로 치우쳐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이다.지난 1801년 신유박해가 종결된 뒤 조정에서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몰아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때 충청도 충주, 청양, 덕산 고을과 전라도, 경상도(상주)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이곳 노래산에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다.증언자 윤순종(63)씨에 따르면 그때 30여호(100여명) 신자들이 높은 산꼭대기의 분화구처럼 생긴 이곳에서 16만평의 넓은 산지를 개간해 화전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면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특히 이곳은 임진왜란(1592년) 때 피난지로 재상 유성룡의 형인 겸암 유운룡이 새로운 방법으로 왜군을 물리쳐 유명한 ‘겸암비결’이 일어났던 곳으로 유운룡은 노래산 뿔각전에서 새로운 병법을 익혀 임진왜란 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아마도 신자들은 이곳 노래산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던 것을 알고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던 중 1814년 전국에 혹심한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때 노래산 교우촌을 드나들면서 돈과 옷가지와 양식을 구걸하던 전지수 란 사람이 청송현에 밀고해 그해 부활축일인 2월 22일(금) 포졸들이 들이닥쳐 미사 중이던 교우들을 모조리 체포하게 되면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이렇듯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고 재산을 약탈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힌 을해박해는 교인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몰지각한 백성들의 탐욕과 조정의 박해령 없이 지방관아의 자의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다른 박해와는 그 성격이 판이하다.이제 천주교 안동교구와 청송군은 노래산 성지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서둘러 성지조성을 통해 노래산 교우촌이 재조명되고 관광산업이 활성화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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