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 항해의 전진기지인 ”蔚珍”을 강조하여 독도의 영토권에 일조하고 일조 통해 울진 관광을 역사와 관련시켜 울진의 경제활성화를 도모하는데 취지와 목적을 두고 있다.울진 사람들은 고대~조선시대에 걸쳐 울진도 및 독도를 드나듦으로써 독도 수호 담당자 역할을 수행하고,울진은 울릉도와 수토사들의 유적지인 대풍헌,월송포진성,구산항 등 역사적으로 울릉도.독도를 행정적으로 관할했다.특히 포항.강원도 강릉,묵호항은 울릉도.독도와 역사적.지리적 무관함을 강조하여 스토리텔링이 있는 울진-독도 관광 루트를 개발하여 독도 영토수호의 전진기지 ‘울진’을 강조하여 관광자원 홍보에 앞장서고 있다.이 행사는 울진군이 주최하고,울진문화원이 주관,경상북도가 후원한 가운데 울진군은 지난 5월 20일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대풍헌 마을에서 수토사 가장행렬을 월송포진에서 대풍헌까지 수토사 행렬 재현과 함께 울진 “수토사의 후예” 울릉도.독도 학술탐사를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일대 및 월송포진성,삼척,울릉도.독도를 다녀오는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다.수토(搜討)의 의미와 역사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수토란 ‘어느 지역을 수색하여 무엇을 알아내거나 찾기 위하여 조사한다’는 뜻이다.그러므로 조선시대 울릉도 수토란 울릉도에 들어가서 섬의 형편을 조사하고 몰래 울릉도에 들어가 사는 주민이나 혹은 일본인이 우리 영토에 들어와 있는지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의미이다.조선 후기 1693년 안용복이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 어부들에 의해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여간 사건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울릉도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다.이로 인해 조선은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를 수토사(搜討使)에 인명하여 3년 또는 2년에 한 번씩 교대로 울릉도를 수토하여 관리하게 했던 것.이는 1694년 장한 상의 울릉도 수토로부터 1894년 수토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200년간 시행된 국가정책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대풍헌(待風軒)의 자료에는,동해안 해변의 구산리 마을 중심부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원래 이 건물은 동사(洞舍)였으나,조선 후기 구산항에서 수토사들이 순풍(順風)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장소가 되었으며,구산항이 울릉도 수토 출항의 기점임을 알려준다.또 이곳에는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 등 수토사 알행의 각종 경비를 조달하는 방책이 적힌 “완문(完文),(1871)과 ‘수토절목(搜討節目)’(1883)”이 있으며,대풍헌에 걸린 다수의 현판(1851~1906)은 당시의 지역 상황을 잘 알려준다.이 때문에 대풍헌은 조선시대 울릉도를 순찰하던 수토사들이 머문 장소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며,최근 고문서와 현판들은 우리나라가 울릉도를 지속적으로 관리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조 최고의 진경화가인 겸재 정선의 ‘월송정도’도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이에 따라 울진군도 ‘수토문화나라’조성사업을 통해 월송포진 일대를 국내에서 대표적인 ‘국토영유권 역사문화관광권’으로 조성하고 있다.월송포진의 유적이 위치한 월송숲의 북쪽 언저리에 서 있는 ‘평해 북천교비(군무교비)’도 눈길을 끈다.이 석비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당시 교량건설에 동원된 민중들의 이름과 역할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이것은 독도 실질 지배의 역사성과 독도 수호의지를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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