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에 공직에 입문해 40년간 공직생활을 돌아보면 이게 내 천직이구나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40년간 오직 공무원으로써 삶만 생각했으니 말입니다.”최만달 맑은물사업소장의 40여년 간 공직생활에 대한 짧은 소회다.그는 1975년 고교 3학년 약관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집안사정이 어려워 떠밀리다시피 영일군 공무원으로 임용시험에 응시하게 된다. 첫 월급은 고작 2만 3천원. 적은 월급이었지만 집안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기에 뿌듯했다는 최 소장.이후 많은 대졸 공무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꿈꾸기도 했지만 “그 시간에 시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공무원의 책무다”며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기를 수차례.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의 선택의 옳았고 다시 돌아가도 그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한다.최 소장은 남들보다 빠른 승진케이스는 아니었다. 오랜 7급 계장생활 이후 2003년 불혹 후반의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5급 사무관 승진과 함께 대송면장으로 발령받았다.이후 두호동장, 남구청 세무과장, 포항테크노파크 사무국장, 여성가족과장, 수산과장, 장량동장을 거쳐 퇴직을 1년 남겨둔 올 초 맑은 물 사업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최 소장은 기억나는 성과가 있느냐는 기자 질문에 부끄럽다며 한마디씩 내 뱉었다.“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법무계장 재직시절이다. 그때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한 시유지 5,300여 평, 현시가로 100여억 원이나 땅을 되찾는 성과를 거뒀다. 같은 일을 하는 공무원 선배의 땅이라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지만 녹취록을 작성해 재판에서 승소했다. 또한, 포항테크노파크 파견시절 세계 최고 의료기기 전문 업체인 독일 지멘스를 원주로부터 포항으로 옮겨왔다. 그는 지금도 “포항에 지멘스가 있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수산진흥과장시절 ‘북부해수욕장’을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전국 유명 관광지로 만든 것 등이 공직생활하면서 뿌듯했던 기억이다” 라며 과거를 회상했다.이제 퇴직까지 고작 1년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계획을 묻자 최소장은 “올 6월에 명예퇴직을 신청할지, 아니면 내년에 정년퇴임을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결정이 포항시민들에게 좀 더 봉사할 수 있을지가 확실해 지면 그 때 결정 하겠다” 며 퇴임하는 그날까지 포항시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40여 년간 포항시 공무원으로 시민들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최만달 맑은물 사업소장.“퇴직 후에도 포항시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 는 그를 통해 비리와 갑질 논란에 얼룩진 공무원 사회에서 진정한 공복으로서의 표상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경상매일신문=최성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