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9시 수업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6시 40분 버스를 탄다. 그리고 1시간 40분 후, 한 주일마다 서서히 달라지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며, 천천히 강의실로 향한다. 그때쯤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교내 방송국의 음악. 하지만 늘 걸 그룹이나 아이돌 그룹의 표피적이면서 자극적인 노랫말을 듣는 것은 여전히 불만스럽다.그 날도 별반 다를 게 없었던 아침이었다. 그러나 웬걸 좋아하는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 후회없이 사랑했었다 말해요,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더벅머리 가수 전인권의 노래였다. 일상적으로 20대 초반의 학생들을 접할 수 있는 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덩달아 청춘을 유지하는 듯 행복한 착각도 주지만 지금 한국의 20대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기에 그 무게감이 결코 만만치 않다. 온갖 ‘0포 세대’를 관통하는 삶을 사는 그들에게는 기성세대의 어줍잖은 위로도, 파이팅도, 혹은 관망의 시선도 불편부당하기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늘 수업시간에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날 아침수업 오프닝은 ‘걱정 말아요, 그대’를 같이 듣고, 감상을 나누는 것이었다.초, 중, 고, 최소한 12년을 오로지 대학을 위한 시간으로 채웠던 그들에게 정작 대학은 어떤 모습인가? 한 마디로 기-승-전-취업의 공간이다. 그런데도 졸업 후 청년 취업률은 계속 기록갱신중이다. 전 세계적인 저성장의 늪에서 한국만이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교육부의 프라임 사업선정에 목숨을 걸듯이 인문사회계열의 통폐합을 우선시하고 이공계학과를 신설, 증편하는 구조조정 또한 청년취업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비극적이게도 한국의 모든 청년들이 이공계열의 적성을 갖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이 곧 사회와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문제는 대학이라는 공간의 정체성 확립이다.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그야말로 ‘大學, 크게 배우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취업은 배우고 난 다음의 문제이다. 혹자는 무슨 헛소리인가 라며 혹독한 비난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대학을 이렇게 정의하지 않는다면 학생도, 선생도 ‘지금,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에 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학생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대학은 그 자체로 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후회 없이 읽고, 보고, 쓰고, 듣고, 질문하며, 사랑하고, 상상할 수 있는 청춘을 위한 대학!공무원, 교사, 공기업 입사와 같은 선망하는 직종에서 평생 일한다고 해서 과연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이 길고 긴 homo hundred(호모 헌드레드, 백세시대)의 시대에. 그러므로 대학은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말처럼 ‘헛소리를 지껄일 자유’가 있는 유일한 곳, 그리하여 그 다채로운 헛소리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뜨거운 희망의 목소리가 태어날 수도 있는 그런 곳이다. 그리하여 대학은 귀하디 귀한 우리의 청춘들이 세상을 향해 ‘이제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할 수 있도록 마중물이 되어야만 하리라. * 칼럼명을 광이불요로 정했다. 빛나되 요란하게 번쩍거리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