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이 지워졌다가까운 길도 지워졌다산이면서 길이던 당신도 지워졌다관계와 관계가 모두깨끗이 지워졌다욕망의 고리들을 다 풀어버린 채로레일도 바퀴도 없는 은하철도를 타고무중력 자유로 가는이 아침은 오리무중시 읽기=한계령을 넘어 온 새벽, 양평가까이에서 갑자기 표지판이 사라지고, 달리던 앞차의 전조등이 사라지고, 앞이 툭 끊긴 잿빛암막 속에 갇힌 적이 있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순간은 섬뜩한 공포였다. 예상치 않던 사라짐은 그런 것이다.그러나 시인은 안개 낀 아침,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행적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아침을 무중력의 자유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먼 산부터 차츰 가까이 부옇게 차오르는 안개에 모든 풍경이 지워졌다. 산이면서 길이던 사람이 지워지고, 모든 관계도 깨끗이 지워졌다. 어쩌면 삶의 전부였을 지도 모를 믿음이고 의욕이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고, 모든 관계들이 한순간에 깨끗이 지워진 순간은 얼마나 허탈하고 아뜩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는 동안 지워버리고 싶은 일을 만나게 되고, 때때로 텅 비우고 싶어지는 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지워지면 어떤 사실이나 상황은 물론 모든 욕망이나 갈등의 고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텅 비운다는 일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기도 하다. 삶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크게 갈구하게 되는 무한한 자유....! 어떠한 인식도 없이, 어떤 구심력(求心力)도 없이 텅 비워진 마음상태, 어떤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무중력의 자유다. 시인은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들이 지워진 아침 안개 속의 아뜩함을 무중력 자유로 가는 길로 받아들인다. 안개가 차올라 모든 것이 지워진 아침, 아뜩한 오리무중의 순간을 무한한 자유의 순간으로 승화시키는 성숙의 지혜를 모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