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다. 강을 건너기 위해 쪽배를 기다려야 했고 뭍에 나간 가족을 기다리는 섬 주민은 물때를 기다려야 했다. 밀물이 들 때 까지 갯가 바위에 앉아 불안석인 기다림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리와 연육교로 언제든 나다니게 되었으니 배편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무소식에 애타던 것도 옛일이다.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휴대폰이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데이트를 예상치 않았던 날씨로 망칠 이유도 없다. 일기예보를 장단기로 알려주고 그 정확도가 높으니 예보에 맞추어 준비하면 된다.자연의 산물인 채소와 과일 마저 계절을 기다리지 않는다. 싱싱한 토마토나 수박 맛을 언제나 맞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제철에만 맛볼 수 있는 신선하고 특유한 본래의 맛은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아이를 키우고 교육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특성을 찾고 계발하기 위해 기다리기보다 우선의 성적에 조급해하는 부모의 채근에 아이들은 어깨만 무거워져 무한히 커나갈 가능성은 싹도 제대로 틔우지 못한 채 시드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절실히 기다려 본지가 언제였던가? 기다림 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다리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시대다.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가족의 건강을 고려한 밥상을 위해 고민하고 요리하기보다 밥은 예약 타이머에 맞기고 반찬은 수퍼마켓 진열대에 의존한다. 식당에선 ‘빨리빨리’가 입에 배었고, 기차나 버스가 미처 정류장에 정차하기도 전에 모두 복도에 일어서 내리기를 기다린다. 먼저 타고 먼저 내려서 얻은 시간을 얼마나 귀중하게 사용할까? 초를 아낄 정도로 급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조급하고 뒤지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버릇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각하고 그리워하기보다 만져보고 확인하고 먼저 가야 직성이 풀린다.기다리는 시간은 생각의 싹을 키우는 온상과 같다. 기다리다보면 상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고 상대에 대하여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면 기대, 설렘, 노여움 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장독대 위의 장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위와 추위를 거치며 숙성되며 맛을 더해가듯 기다리는 대상과의 관계의 깊이도 점점 깊게 만들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 벅차오르는 행복을 맛보기도 하고, 뱃길을 막는 높은 파도 같은 현실에 원망과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고, 자신과 상대의 거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 이런 것들은 기다림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기다림이 있는 생활을 통하여 깊이 있는 생각을 하고 이를 반복하다 보면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혀지고 이런 것들을 통해 삶은 성숙되어갈 것이다. 기다림이 있는 삶이어야 한다. 모든 관계의 대상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고 그 사이를 기다림으로 채워 보면 어떨까? 불신을 바탕으로 한 밀착보다 신뢰와 자유가 있는 거리를 유지하며 기다리고 이해하기를 반복하는 삶, 그런 삶 속에서 관심이, 정이, 사랑이, 싹트고 자라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