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이 구랍 12월 18일 임시 서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을 새로 지은 전용 서고로 옮기는 환안(還安)의식을 거행하였다 한다. 이번 환안의식은 고증에 따라 옛날 방식을 재현한 특별한 의식으로, 조선 철종 이후 130여 년만이다. 지금부터 백여 년 전, 조선총독부로, 경성제국대학 등으로 방랑하던 조선왕조실록(태백산본)이 1985년 부산 정부기록보존소로 옮겨진 후 전용서고 없이 보관되어 오다가 이제 새 실록전용 서고에 봉안하게 되었단다.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이다.조선 5백 년 왕조의 역사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정된 민족의 기록문화유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조 국가의 정사로 편찬됐으며, 임진왜란 이후 내사고(內史庫)라고 할 수 있는 춘추관과 외사고인(外史庫)인 정족산(마니산), 태백산, 적상산(묘향산), 오대산 사고 등 모두 다섯 곳에 실록을 분산해 보관해 왔다. 이들 실록 중 춘추관 실록은 이괄의 난 때 소실됐고, 적성산 사고본은 북한,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일본에 반출됐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남은 것이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다.태백산본이 안치되었던 태백산사고터(사적 제348호)는 봉화 춘양면 석현리 각화사(覺華寺) 북쪽 1km 지점의 해발 1,000m가 족히 되는 각화산 험산에 매달리듯 얹혀 있다. 임진왜란의 홍역을 겪은 터라 화마나 반란군이 들어오지 못하는 비장의 심심산골을 찾아 사고지를 정한 것이다. 1605년 경상감사가 태백산 지맥의 입봉지하(立峰之下)가 사고지(史庫址)로서 적당하다고 보고하자, 조정에서 다음해 4월 사고를 완성하고 그때부터 실록을 보관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연히 수호사찰은 각화사였고, 따라서 수호총섭(守護摠攝)도 각화사 주지가 맡았다. 수호군(守護軍)은 25인 정도였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은 그렇게 고즈넉이 300여 년 동안 봉안되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정족산본과 함께 1908년 조선총독부로,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떠다니던 것을 광복 후 서울대 도서관(규장각)이 수장하여 왔는데, 태백산본은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가 마련되면서 부산으로 이관되었고, 이제 새로 마련된 최신형 서고에 환안된 것이다. 국가기록원이 정족산본을 제쳐두고 태백산본만 이곳으로 이관한 것은 그 보존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이다. 19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태백산본을 영인하여 일반에게 배본하였기에 지금의 조선 역사 연구와 방송 사극 등은 모두 영인된 태백산본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은 그렇게 안전한 곳으로 환안되었다지만, 그를 보관했던 태백산사고는 소실 100여년이 지나도록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 5대사고 중 다른 4곳은 모두 일찌감치 복원작업을 마치고, 역사문화탐방 등의 교육장으로 활용을 서두르고 있으나, 그 종주격인 태백산사고 복원은 아직도 지지부진하여 할 말이 없다는 게 해당지역의 여론이다. 더구나 태백산사고는 실록각, 선원각과 실록 보관 모습 등이 생생하게 사진으로 남아 있어 다른 어느 곳보다도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할 수 있으며, 대학 박물관의 발굴조사, 문화재청의 복구비 책정까지 마친 상태인데도, 부지 소유자인 각화사 측의 입장 때문에 지금까지 공전만 거듭하고 있단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역사를 담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역사서로, 중국, 일본, 몽골 등 주변국가의 시대상황도 같이 기술되어 있어 동아시아 연구에도 꼭 필요한 자료이다. 조선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록열을 가진 나라였다. 기록열만이 아니라, 그걸 보존하기 위한 열정도 대단했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후대가 판단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보존하는 열정이 인구비례 최다 세계인류문화유산을 보유하는 국가로 등재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조선왕조실록이 있고, 그리고 그 실록을 온전하게 보관했던 태백산사고 등이 있었다.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태백산사고는 조속히 복원되어야 할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