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세의 아버님을 뵈오러 고향을 다녀 오는 길에 옛 추억을 되새겨 보려고 시골 장터에 잠시 들렀다. 우리 어머님 연세쯤 되어 보이는 분이 난전에 앉아서 빨간 햇고추를 비닐 두 개에 넣어서 하나는 열근, 하나는 다섯 근짜리라고 하면서 사라고 하였다. 더위에 땀 흘리는 모습을 보니 이 고추를 직접 생산하느라 얼마나 고생했겠나 싶어 값도 묻지 않고 다섯근 짜리를 달라고 했다. 비닐에 비치는 고추는 빨갛게 잘 익었다. 고추는 땀으로 가꾸어지는 피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고추는 모종으로 키워 다시 본밭에 북돋운 이랑 위에 비닐을 깔고 거기에 구멍을 뚫어 이식을 하여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떠다가 정성을 다하여 새 모종을 잘 보호해야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억지로 가꾸어 놓은 고추가 말라 죽어 있으면 다시 보식을 하고 또 물을 주어야 한다. 수확기는 한 여름철이기에 땀을 흘려야 한다. 지열 때문에 얼굴이 푹푹 달아오른다. 이만큼 빨갛고 굵고 긴 고추가 수확된 것은 많은 땀을 흘렸다는 것을 안다. 여름철이 되면 풋고추를 그냥 따서 보리밥과 함께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찌개나 매운탕에 넣어 얼큰한 맛을 내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다 익은 것은 따로 따 모아 따가운 가을볕에 바짝 말려서 빻아 고추 가루로 고추장도 담그고 반찬의 향신료가 된다. 추수할 때 덜 익어 잘잘한 것들은 쪄 말려서 겨우내 밀가루 묻쳐 바삭바삭 하도록 튀겨서 반찬하고 또 굵은 것은 된장독에 깊이 넣어 두었다가 꺼내면 고추짱아지가 되기도 한다. 근대화 이후에는 환금 작물로서 농촌에서는 일등 공신이었다. 내가 살던 농촌에서는 몫돈 마련의 방법으로 고추나 마늘을 팔아 중고등학교 등록금도 내고 돼지나 소를 팔아 대학의 등록금을 마련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는데 그 때 여행비가 없어 걱정하다가 씨받이로 남겨둔 고추를 팔아 다녀왔다. 고추가 우리 형제들 교육의 일등 공신이었다. 그 때 흘렸던 아버지의 땀을 생각하면 지금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해도 아깝지 않지만 가끔 아버지를 뵈오러 오는 것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불효자가 되었으니 고추를 사면서도 아버지의 고생을 잊을 수 없고 그런 생각을 한 것조차 죄송한 마음이었다. 고향의 좋은 고추를 가지고 고추 방앗간에 갔다. 주인이 “이렇게 젖은 고추는 빻아줄 수 없어요. 더 말려서 오세요” 하면서 도로 가져가라 하였다. 이튿날 햇볕이 뜨겁기에 덜 마른 고추를 아파트 빈 터에서 말렸다. 잠시 골고루 펴서 너는데 땀이 났다. 곧 마를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오후에는 다시 방앗간에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시내 가게 개업 축하하러 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소나기가 내렸다. 고추 말린 자리에 쫓아가보니 고추는 물에 잠겨 있었다. 건져 오는 길에 이웃에 사는 분은 “이러지 말고 농협에서 운영하는 건조기에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나 고추의 양이 적어서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이웃까지 동원해서 하나씩 닦아 다시 작은 방에 깔고 보일러를 돌려 밤새도록 말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덜 말라서 햇볕 좋은 곳을 다시 찾아 널었다. 오후에 가 보니 아파트 건물 사이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돗자리가 날아가 버렸다. 다시 흩어진 고추를 주워담아 바람이 없는 곳으로 옮겨 놓았더니 삼복 더위 속에 고추는 잘 말려졌다. 다시 방앗간에 가져가서 무게를 달아보니 다섯 근이란 고추가 네 근 밖에 되지 않았다. 완전히 마른 것이라고 산 것이 잘못이었다. 청양 고추가 맵다고 했는데 고향시장 난전의 고추 할머니가 이렇게 매운 줄 몰랐다.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는 그 할머니는 전문 장사꾼이었다. 고향의 정만 가지고, 시골 할머니만 믿고 고추를 산 우리가 바보였다.고향의 인심도 세월따라 이렇게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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