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필자의 생각으로는 죽지 못해 산다는 대답이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김없이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인생은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서 산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은 동물이 갖지 않은 영혼을 가졌다. 따라서 사람의 가치, 사람의 도리로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면서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심일 것이다.
조사기관에 따르면 OECD 조사대상 143개국 중 한국의 행복지수는 118위로 세계 수출 7위,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목전에 둔 경제수준에 비해 부끄러운 수치다.
지나친 물질추구와 인문가치의 타락이 원인으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 졌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자살률은 급증하여 10년째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현재를 사는 우리 아버지들 또한 고단하기는 이를 데가 없다. 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을 볼 수 없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수컷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경쟁을 업보처럼 지니고 살아야 한다.
인간의 수컷인 남성 즉 아버지의 운명도 동물세계 수컷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위계질서나 서열을 정해야 평화가 유지되는 수컷 세계의 속성상 평생 싸우고 투쟁하는 것이 아버지들의 운명이다.
힘센 자, 가진 자, 잘난 자, 높은 자들이 거의 독식해 왔기 때문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건 싸움도 불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들이 생존경쟁의 전장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패하고 돌아왔을 때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고 함께 슬퍼해주고 아파해주는 사람조차 없으니 아버지들은 어떻겠는가? 울고 싶어도 울 곳조차 없어 더 슬플 뿐일 것이다.
필자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동창회 모임에 나가보면 우리세대는 부모를 모셨던 마지막 세대이며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최초의 세대라 자식과 가족으로부터 냉대 받고 있다는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접한다.
힘들고 외로운데 어디에다 말할 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것이 한결같은 일성이다.
요즘 50대는 아내가 외출할 때 어디 가느냐고 묻지 말아야 예의이고 60대는 아내에게 밥상 차려달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예의이고 70대는 아침에 눈뜬 것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 예의라는 우스게 소리가 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겠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아버지가 병들면 가정도 병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항간에 인터넷에서 소개된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작가미상의 글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고 자녀들의 학교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며 자식들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열 번도 넘게 현관문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버지다고 했다.
즉 기분이 좋아도 잘 웃지 못하고 겁이 나도 내색을 못하며 화가 나도 표현을 하지 않고 걱정이 되어도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란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사람들일까? 아버지는 마음이 먹칠을 한 유리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깨져도 속이 잘 보이지 않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란 존재는 동네어귀 정자 옆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말없이 서있는 느티나무와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버지가 병들기 전에 남편이 죽기 전에 먹칠한 유리처럼 가려져 있는 아버지의 몸과 마을을 미리 살피고 헤아려 주자. 한번 금이 가면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아버지들의 건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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