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김놀 기자] 호국보훈의 달 기획기사 “꽃처럼 고왔던 25살, 행복했던 결혼생활 멈춰버려 시신이라도 찾아주길…인생 마지막 가장 큰 바람” “앞으로 제가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남편 시신이라도 찾아 국립묘지에 함께 묻히는 게 인생의 마지막 가장 큰 바람입니다.” 1950년 8월 7일(음력 6월 24일) 영덕지구 전투에서 남편 이진국 상사를 잃고 그리움 속에서 65년 인생을 혼자 살아온 6.25참전 미망인인 김화순(90ㆍ여) 여사님의 마지막 소망이다. 지난 2일 오전 포항시 해도동 포항운하 인근에 위치한 ‘포항보훈경로당’에서 만난 김화순 여사님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남편 없이 무심하게 흘러간 지난 날을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여사님은 살았으면 올해 98살이었을 자상한 남편을 떠올리고 눈시울을 붉히며 아가씨에서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이제는 90살이 된 늙은 미망인으로서의 당신의 기구한 인생사를 구구절절이 털어놨다. 1950년 7월 16일에 시작돼 8월 17일에 끝난 영덕지구 전투는 국군 제3사단이 영덕지역에서 UN군과 해군,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제5사단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남편을 잃으면서 행복했던 그녀의 결혼생활은 3년째에서 멈춰버렸다. 꽃처럼 곱고 아름다웠던 25살의 젊은 그녀에게 남은 건 ‘남편 전사통지서’와 ‘두 살 배기 어린 아들’뿐이었다. 형산강변 여기저기 즐비한 시체와 수많은 핏자국, 화장하느라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연기 등 참혹한 상황에서 전사한 남편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김 여사님은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하나뿐인 젖먹이 아들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매일 논밭을 매고 나무를 베어오는 등 한 푼이라도 생기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시계가 없어 날이 언제 새는지, 몇 시인지도 모른 채 어둑어둑한 새벽에 밖으로 나가 수십 고랑의 콩 밭을 다 매고 나도 날이 밝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면서 죽지 못해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 와중에도 인생의 버팀목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 이상열(67)씨는 대학 졸업 후 포스코에 입사했지만 어릴 적 가난으로 제때 치료하지 못한 중이염 때문에 귀가 어두워져 결국 적응치 못하고 그만둔 게 두고두고 미안하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날 김화순 여사님이 혼자 인터뷰하기 힘들 것 같아서 부른 친구이자, 같은 미망인인 김경선(88ㆍ여) 여사님은 당시 포항소방서 소속이었던 남편 손진명 소방차총괄부장을 형산강 전투에서 잃었다. 김경선 여사님은 “피난을 갔다 와서야 전사한 걸 알고 남편의 시신은 찾았지만 묘지조차 관리할 능력이 없어 화장을 해서 남편의 유골을 바다에 뿌려버려 무덤이 없다”며 아쉬움과 죄송함을 드러냈다. 더욱이 6.25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했지만 주검을 찾지 못 해 국립묘지에 안장 될 수 없는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뷰 말미에 김화순 여사님은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내 남편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고 시체라도 찾아 달라”라며 눈물로 기자에게 하소연을 했다. 광복 70주년, 6.25주년 65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 국가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분들의 소원을 꼭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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