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와 솔바람이 어울려 보리를 익히는 호미곶 구만리를 찾아 가는 길, 먼저 동해면 발산리 해안가에 모감주 나무 군락지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병아리 꽃나무의 하얀 꽃이 진을 치고 모감주 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모감주 나무는 영어로 ‘Golden rain tree’라고 부르는 황금비 나무다. 황금색에 붉은 색을 띠는 작은 꽃이지만 아직은 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마침 마을 이장님을 만나 물으니 7월 초에 황금색으로 물들여 꽃비를 내린다고 한다. 이곳 발산리 모감주 나무는 천년기념물 37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수종인데 열매가 단단해서 염주를 만든다고 염주나무라고 한다. “이 염주나무 때문에 동네가 시끄럽고 먼지가 날리고 쓰레기만 남는다”고 하면서 “정부에서도 면사무소에 배부하는 관리비를 주민들에게도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장님의 불만스런 말을 들었다. 해풍을 맞아 꽃비를 내릴 때를 기대하면서 앙증맞은 병아리 꽃나무 하얀 웃음꽃을 뒤로 하고 호미곶으로 향했다. 호미곶 광광지 초입에 들어서니 빨간 장미가 넋을 빼앗아 잠시 멈추어 카메라에 담고 풍차가 유유히 돌아가는 등대 박물관을 향하여 내려갔다. 구룡포에서 이어지는 해변 도로와 도보로 바다를 즐기는 해파랑길을 따라 가다 보면 ‘구만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대보면 연혁에 보면 구만리는 조선시대 12세의 단종을 폐위한 수양대군이 단종을 위해 충성하는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과 그의 두 아들, 손자를 죽인 계유정란(1452년)때 황보 인의 손자 와 관련된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황보 인의 일족이 죽임을 당하자 단양(丹良)이라는 여종이 황보인의 손자 단을 물동이에 숨겨 머리에 이고 나와 팔백리를 걸어서 봉화군 상운면에 있는 고모부 윤당의 집에 갔으나 삼족을 멸할 것을 우려하여 새 옷만 갈아 입히고 다시 피신하여 젖동냥을 하며 걸어 걸어 동쪽으로 오니 앞은 바다로 막혀 있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그만’ 여기서 머물자고 하여 ‘구만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곳이다. 지금도 후손들이 사는 구룡포 성동의 광남 서원에 가면 충비 단양비가 세워져 있고 황보인의 후손들이 영조 때 복위된 이후 세덕사에 황보 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해마다 배향한다. 몇 년 전 광남 서원에 갔을 때 영천에 사는 황보씨 화수회에서 단체로 와서 충비 단양을 우리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존경하고 배향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공교롭게도 이곳 구만리에는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가 서 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여 해방을 기리는 시인의 간절한 염원이 담겼다. 이 시에도 항일 독립 운동으로 투옥되어 죄수 번호 264번인 시인이 그 번호로 이름을 지어 발표한 시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청포도’란 시이다. 안동에서 여기까지 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청포도원을 배경으로 썼다고 한다.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우연히 집을 나선 구만리 산책길이 푸름을 더해 주는 5월의 바다와 우거진 녹음의 어울림이 싱그러움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단종애사 가운데 황보 가문의 명맥을 이어 준 충비 단양의 구만리 고난의 역사를 현장에서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구만리 청보리도 이제 누렇게 변하였다. 민족의 아픔을 안고 희망을 노래한 시인 이육사 시비 뒤로 느리게 돌아가는 저 풍차처럼 조용히 마음을 닦아 청포도가 익어가듯 내공의 힘을 길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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