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반복해 감상하는 책과 영화, 음악 혹은 그림들이 있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심지어 다섯 번을 보아도 그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감흥들이 있고, 특정한 장면에서는 주인공의 대사까지도 중얼거린다. 가히 공감능력의 최후단계가 아닐까 싶다. 최근에 나의 반복 감상 리스트에 추가된 영화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이다.
2차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영국 암호 해독팀의 활약상을 리얼하게 묘사한 이 영화는 특히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의 ‘사랑’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기막힌 발명품 ‘크리스토퍼’가 컴퓨터의 원조가 되었으며, 애플사의 로고를 ‘한 입 베어 문 사과’로 결정한 계기는 그를 존경해마지한 잡스가 자살한 튜링의 옆에 있었던 청산가리 사과를 애도의 상징으로 남기기 위해서라는 등, 그리하여 이제는 세계 3대 사과가 아니라 세계 4대 사과라는 등등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일화들은 뒤로 하고 싶다. 더불어 독일군에게 그들의 암호를 해독했다는 단서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매일 연합군을 일정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는 판단의 순간에 개입하는 치밀한 전쟁과 수학, 과학의 결합에 대한 아이러니와 공포도 뒤로 미루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스스로 생을 마감하도록 한 관습, 법과 국가권력의 폭력성에 주목하고 싶다.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암호 해독팀의 일원이었던 여성과 결혼까지 불사한 그였지만 전쟁 후 그가 받은 보상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었다. 동성애자는 곧 범죄자였던 당시 영국은 그에게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화학적 거세라 할 수 있는 약을 복용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했다. 그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계 ‘크리스토퍼’의 완성을 위해 약 복용을 선택하고 연구에 매진했지만, 결국은 부작용으로 시달리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법이 간과하는 문제는 앨런 튜링이라는 남성은 그 어떤 여성과도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범죄적 문제’가 아니라 그의 성적지향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한 개인의 성적 지향이 보편적 사회관습에 위배된다고 해서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과연 만인에게 평등한 법의 정신에 합치하는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거의 누구나 당연시하는 이성애라는 것이 인류역사에서 언제부터 보편적 규범으로 작동했는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현재 프랑스의 오를레앙 대학의 문학교수이자 인권활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루이 조르주 탱의 『사랑의 역사』에 의하면, 인류 역사에서 이토록 권장되고 미화되는 이성애 문화는 등장시기가 그리 길지 않다. 이성애문화는 12세기 초, 궁정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성직자계급이 적법한 이성애관계에 대한 기본 틀로 결혼윤리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확실히 이전시대에는 남녀커플이 그 자체로 예찬되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죽음도 불사하는 사나이들의 우정과 육체적 관계 포함 유무를 떠난 사랑이 기사도의 전통으로 찬미되기까지 했다. 근대로의 이행은 정치, 경제, 철학, 사회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으로 변화해왔지만 특히 이성애문화는 남녀커플을 미화하고 숭배하는 텍스트의 엄청난 출현과 예술적 재현에 힘입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렇게 굳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봐야만 마치 동성애에 대한 설득력이 있을 까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이성애자인 사람들이 동성을 사랑하고 싶지 않듯이 그리고 그것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또 누군가는 전혀 사랑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고유한 개인의 권리로 작동한다. 동성애자인 그들에게도 누군가를 사랑할 권리, 혹은 사랑하지 않을 권리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한데 말이다.
마침 이 글을 시작한 지난 주(5. 23) 아일랜드에서는 국민투표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천재 수학자이기 전에, 전쟁영웅이기 전에, 그저 오직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 사랑을 하고자 했던 앨런 튜링을 또 다시 깊이 애도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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