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당국은 바람이었다. 구름이었다.
첫눈이었다. 긴 강물이었다. 풀꽃이었다.
내 지도교수는 새파란 하늘이었다.
물봉선화였다. 앵두꽃이었다. 이슬이었다.
나의 주치의는 고목이었다. 날벌레였다.
물새였다. 바위였다. 울음이었다.
순이가 몰래 누는 따뜻한 오줌소리였다.
내 부모는 만장이었다. 높새바람이었다.
달 타령이었다. 동동주를 먹는 달이었다.
법도 아닌 밥이고 밤도 아닌 율이었다.
나의 공화국은 꽃피는 새 동네였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노래였다.
무정한 세월이었고 불타는 사랑이었다.
지금도 그리운 무정부시절 내가 원한 것은
뒤란에 양귀비 꽃 하얗게 필 때
마당에 소리 없이 찾아들던 어성초 푸른 초여름
참죽나무 끝에 서성이던 신화의 별 무리였다
◆시 읽기◆
인위적 아름다움의 가변성을 초월한 항시성적(恒時性的) 아름다움이 자연이다. 하늘과 바다, 해와 달과 별, 철따라 바뀌는 산과 들의 모습 그리고 농촌의 소박함까지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들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모든 생명들도 귀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무정부라고 명명했다.
나의 당국은 자연, 지도교수도 주치의도 자연이었고, 법도 아닌 밥이고 밤도 아닌 율이었던 자연 속에서의 나의 공화국은 꽃피는 새 동네......내가 원한 것은 뒤란에 양귀비 꽃 하얗게 피고, 어성초 피는 초여름 참죽나무 끝에 서성이던 신화의 별 무리였다는 시인의 무정부시절이다. 이처럼 만물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천지인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부정부패와 빈부격차의 온상인 정치와 사회에 부조리한 현상들이 생겨났을까?
유려한 시어의 운용으로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와 순응을 절대적 표상으로 내세운 이 역설적인 무정부시절의 핵심주제는 정치와 사회, 상실된 인간성에 대한 비판이다.
모든 불행은 인간의 소유욕에서 출발한다.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돌아보게 하고 반성케 하는, 맑고 순박한 무정부시절....! 참으로 그립고 아름다운 세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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