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그 묵집에서 그 귀여운 여학생이 묵 그릇에 툭 떨어진 느티나무 잎새들을 얌얌얌 씹어보는 양 시늉 짓다 말을 했네
저 만약 출세를 해 제 손으로 돈을 벌면 선생님 팔짱을 끼고 경포대를 한 바퀴 돈 뒤 겸상해 마주 보면서 묵을 먹을 거에요
내 겨우 입을 벌려 아내에게 허락받고 팔짱 낄 만한 준비 다 갖춘 지 오래인데 그녀는 졸업을 한 뒤 소식을 뚝, 끊고 있네
도대체 그 출세란 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출세를 아직도 못했나보네. 공연히 가슴이 아프네, 부디 빨리 출세하게
그런데 여보게나, 경포대를 도는 일에 왜 하필 그 일에 그 어려운 출세를 꼭 해야 하나, 출세를 못해도 돌자, 묵값은 내가 낼게
◆시 읽기◆
약속이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일을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일이다. 잘 지키는 약속은 신뢰의 바탕이 되고 믿음으로 쌓여가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은 거짓이 되고, 지키지 않는 약속은 헛것이 된다. 돈 벌면 함께 팔짱 끼고 경포대를 한 바퀴 돈 뒤 겸상해 마주보며 묵을 먹을 거라고 약속했던 제자는 왜 묵값에 하필이면 그 어려운 출세를 약속했을까? 묵 그릇에 툭 떨어진 느티나무 잎새들을 얌얌얌 씹어보는 양 시늉 짓던 그 귀여운 여학생에겐 어디까지가 출세의 경계일까?
시인은 지금 우리사회의 출세지향주의에 대한 비판과 청년직업난 그리고 청년 삶의 그늘에 대한 아픔을 비의(秘義)로 숨겨두고, 해학과 운치로 시의 맛을 돋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판과 아픔을 미적으로 승화시키는 은유의 맛, 시인들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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